1950년대 미국의 대한 원조정책 변화와 이승만정권의 수출정책 차철욱* 머리말 Ⅰ. ECA 경제원조의 한계와 수출진흥정책 Ⅱ. FOA 경제원조와 수출진흥책의 축소 Ⅲ. 경제원조의 축소와 무역법 제정 맺음말 머리말 이승만정권기 경제는 원조경제였고, 경제정책은 원조 공여국이었던 미국의 목표대로 진행되었을 뿐 이승만정권의 의지는 적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원조를 둘러싼 한미 간의 치열한 갈등이 존재하였고, 이 문제는 거시적인 경제정책의 차이에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한국은 중공업 중심의 경제성장정책을, 미국은 한국을 일본 공산품시장으로 위치지우기 위해 경제안정정책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능동적인 경제정책이 존재했었고, 의지 또한 강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정부는 자립경제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출 혹은 원조를 선별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동안 무역정책 연구는 거의 빈약한 실정인데, 그 중에서도 수출정책 연구는 전무하다. 1950년대 빈약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수입정책과 관련된 정부의 대책이 많이 발표된 것에 비해 수출정책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승만정권기에는 수출정책은 없었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수입정책을 분석한 연구에서 수입정책이 수출진흥을 전제로 진행되었음을 분석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특별외화대부제와 수입할당제는 외형적으로는 수입을 활성화시키려는 정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출진흥을 목표로 실시된 정책이었다. 위 두 가지 정책 모두 수출실적을 수입권 배정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정권의 수출진흥정책을 단순한 무역정책 속에서만 분석할 것이 아니라 당시 전체 경제정책의 범주, 즉 공업화정책과 궤를 같이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수출정책을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경제요소였던 원조정책의 변화와 관련지워 분석하려고 한다. 그 동안 원조연구는 미국의 대한경제정책, 산업구조의 변화와 자본축적과 관련하여 진행되었을 뿐 한국정부의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분석하지 못했다. 본고에서는 수출과 원조의 양자 관계를 한국정부의 자립경제정책의 목표와 연계지워 분석하려고 한다. Ⅰ. ECA 경제원조의 한계와 수출진흥정책 미군정 무역정책은 국내 필수품 조달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현실적으로 필요한 물자의 조사나 계획을 기초로 하지 못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정권은 미군정과 달리 적극적인 경제성장정책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여기서는 이승만정권의 초기 경제정책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수출정책을 검토하려고 한다. 정부수립 초기 한국 경제정책은 철저한 국가 주도 아래 공업화를 이룩하여 자급자족을 지향하는 경제성장론이었다. 경제성장론에 근거한 경제정책은 대통령 혹은 정부의 시정방침 연설에서도 꾸준하게 표명되어 왔는데, 보다 구체적으로는 1949년 계획된 '5개년 물동계획안'이었다. 1949년 4월 15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이 계획안에는 농업, 임업, 축산업, 잠업, 수산업, 광업, 금속기계기구, 섬유, 화학, 식료품, 요업, 동력 등의 산업 전 분야가 망라되었다. 그 내용은 중요물자의 생산계획, 국내 수급계획 및 국외 수출입계획으로 구성되었다. 이 계획은 특히 식량 자급자족, 동력자립, 연료증산, 방직공업 육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중공업 설비를 확충하여 경공업의 자립체제를 도모하도록 계획되었다. 물동계획의 목표는 경공업 육성정책이며 이를 지원할 기계, 제철, 제강, 화학, 조선, 시멘트, 비료 등 중공업 육성도 동시에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완제품은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 Mission on Korea; 駐韓經濟協助處) 원조와 대외무역으로 조달하려 했고, 수입의 우선 순위는 ECA 원조, 대일 무역, 기타 지역 무역으로 정하였다. 이 계획안은 1948년 미군 철수에 대응한 ECA 경제원조가 결정되자 미국이 한미원조협정(1948년 12월)에서 한국에 경제계획을 요구해 작성된 것이다. 그래서 이 계획은 ECA 원조를 최대한 증가시키기 위해 비현실적으로 계획되었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계획안을 통해 한국정부의 자립경제건설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1949년부터 미국 내에서 한·일 경제통합이 논의되었다. 미국 의회는 미국의 원조 부담을 줄이기 위해 한국으로 지출한 원조자금이 일본의 산업부흥에 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원조계획을 세웠다. 이 구상에 대해 한국에 파견된 ECA 담당자와 일본에 있던 미국 육군성 관료들 사이의 논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미국 의회는 원조자금 승인을 늦추었다. ECA 담당자들은 한국을 일본과의 경제관계를 회복하면서도 자립경제를 건설할 수 있는 경공업 중심의 공업재건을 추진하려 했다. 반면 육군성은 일본을 아시아의 공장으로, 한국을 일본의 공산품 시장으로 만드는 지역경제 통합을 구상했다. 이런 논리를 배경으로 ECA 담당자들은 한국에 농업발전을 위한 비료공장 설립을 제안한 반면, 육군성 관료들은 일본에서 비료 구매를 강조하였다. ECA 담당자들의 한국 공업화 건설 계획에 불만을 품은 미국 의회는 1949년 원조 예산안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자의 갈등은 1950년 초 원조자금 총액의 36%를 대일 구매에 사용할 것이라는 ECA 의장 번스의 약속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ECA 원조자금은 미국 의회와 육군성의 강한 요구로 한일경제통합을 위해 사용되도록 추진되었다. 그래서 ECA 담당자와 한국정부가 구상했던 경공업을 중심으로 하면서 중공업을 육성해 자급자족을 실현하려 했던 '경제성장론'은 폐기되고, 필요 물자는 일본에서 수입하면서, 철저히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산업자금 방출을 억제하는 '경제안정론'으로 경제정책이 선회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경제 안정화를 목적으로 일본 상품을 수입케 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공산품 수입을 위한 논리로 한국 공업화를 억제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논리에서 산업부흥을 위한 재정은 인플레를 자극한다는 이유에서 철저히 긴축되었다. 1950년 2월 10일 번스는 이러한 경제정책 변화 속에서 경제안정론에 관련된 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는 ECA 원조자금은 한국의 경제건설보다 균형재정과 인플레를 억제하는데 사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즉 인플레를 극복하고 재정위기를 완화하여 안정을 이룩한 후 생산부흥을 기도한다는 '중간안정정책'이었다. 미국의 요구로 1950년 3월 7일 재무부장관은 담화를 통해 '경제안정15원칙'을 발표하였다. 담화는 '외국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미국의 안정화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언급하고 있다. 이 원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국정부의 경제안정론은 전면적인 산업투자를 억제하는 긴축재정정책으로 인플레를 억제하는 한편, 물가상승을 제어하기 위한 경공업의 부분적 육성과 수입까지 포함하였다.
이 원칙의 지향하는 바는 금후 경제정책은 당분간 생산부흥계획의 전면 동시 전개를 일부 조정하고 중간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재정의 균형과 금융의 건전 및 중점산업의 증강에 두어 인플레 현상을 조급히 극복함으로써 외국 원조물자의 양적 및 시간적 활용 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본격적인 국가경제 부흥의 추진을 가능케할 정상한 경제기반을 회복시킨다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금일 처지로서는 경제산업 전반에 걸쳐서 부흥계획을 최대한으로 추진코자 함은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아직 실지회복이 완전치 못하여 또 국내자원을 무한히 개발할 기술과 물자와 자본도 넉넉지 못하여 당분간은 외국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어려운 현실을 인식할 때 우리들은 모든 경제활동에 있어서 최소의 물자자재 및 자금으로서 가장 신속히 최대의 생산증강을 기하도록 경제적 합리화와 경제순환의 정상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첫째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이나를 막론하고, 비생산적 비용 및 소비를 극도로 제한하고 시간과 물자의 노력과 자금을 국민 경제 전체적 입장에서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각자 경제단위의 수지를 균형시켜야 할 것이다.…둘째로 우리들은 국민경제의 유통질서가 될 수 있는 한 유통 각 부문에 자유의사에 의한 정상화를 기하는 바이나 당분간은 물가조정의 거점이 될 극소부분의 품종에 한하여는 물가통제를 새로운 각도로서 강력 유효하게 확립하게 될 것이다. 세째로 국내 중요자원의 개발 및 생필품 생산진흥을 계속 의도할 것이나 현유 생산조건으로 보아 단기간 내에 생산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부문에 치중할 것이며 국내의 기타 경제부흥은 수출의 필요성에 비교하여는 제2의적으로 생각하여 먼저 대외 수지의 균형을 기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경제안정15원칙은 1∼8항은 통화 재정 금융, 9∼11항은 유통질서, 12∼13항은 생산과 무역, 15항은 임금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통화 재정 금융부분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고, 이 내용 또한 통화최고발행제, 긴축재정, 세금 및 정부 수입 증가, 저축증가 등 통화 흡수방안이었다. 원칙의 기본 내용은 1949년 일본에서 실시된 긴축재정정책인 닷지(Joseph M. Dodge)라인을 많이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칙은 생산부흥계획을 전면적으로 중지하고 재정균형화와 중점 산업부문에 집중투자해서 인플레를 극복하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필요한 생활필수품의 조달 방법에 관해서는 두 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생산은 단시일 내 생산효과를 올릴 수 있는 품목, 수입은 수출량의 범위 내에서 허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경제안정론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더욱 현실적인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유엔군대여금 조달로 인한 통화량 팽창, 산업시설 파괴로 인한 물자 부족으로 인플레가 만연한 분위기에서 경제정책은 당연히 인플레를 통제하는데 맞추어졌다. 1950년 7월 28일 [주한 국련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으로 시작된 유엔군대여금은 통화량증가의 30∼73%를 차지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통화량의 급속한 증발에 반해 산업시설은 1951년 8월말 현재 건물 44%, 시설 42%가 파괴되었다. 그 중 주요 생필품 공업인 방직공업은 건물 62%, 시설 64%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생산시설의 파괴로 생필품 공급이 줄어들어 물가앙등을 촉진했다. 통화량 증가로 인한 인플레를 제지하기 위한 경제안정론은 한국전쟁기 경제정책의 목표로 유용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경제안정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우선 정부재정의 균형, 즉 세입의 증가와 세출을 억제하는 철저한 긴축정책을 강구하고, 둘째 유엔이 제공한 원조물자와 한국정부불을 사용해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를 최대한 흡수하고자 했다. 전자의 재정균형은 전쟁수행이란 당면과제로 인해 애초부터 실현이 불가능하였다. 후자의 방법 즉, 정부보유불은 사용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마찰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한국정부가 사용권을 가졌다. 일차적으로 정부는 보유달러를 사용하여 인플레를 완화하고자 했다. 즉 1952년 중석불 불하와 특별외화대부는 시중 통화 흡수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정부보유불 가운데 유엔군대여금 상환불은 환율논쟁과 관련해 한국과 미국 사이에 치열한 이해관계가 잠재되어 있었다. 한·미 양국은 인플레 해결 방법에서 커다란 의견 차이를 보였다. 미국은 물가가 상승했기 때문에 환율을 인상해야만 인플레를 억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국정부는 환율을 인상하면 도입 물가가 상승하기 때문에 환율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율논쟁은 유엔군대여금 상환과 FOA 원조도입과 관련해 한미간 치열한 갈등 요인이었다. 어쨌든 한국전쟁기에는 긴축재정과 시중 통화흡수정책으로 경제부흥을 위한 투자는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오로지 재정안정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안정정책만이 요구되었다. 한편 ECA 원조자금으로 산업을 부흥시키려 했던 한국정부는 미국의 지역경제통합 요구와 인플레 억제 정책을 받아들여 경제정책을 경제성장론에서 경제안정론으로 변경하였다. 경제안정론 아래에서 한국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재정안정과 인플레 억제에 주력하면서, 생활필수품 생산에 필요한 경공업 성장정책을 병행했다. 한국전쟁기 경제정책의 수립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되었다. 재정담당 관료들은 긴축재정 입장에서 특정산업 투자를 강조한 반면, 무역업자와 산업자본가들은 통화량이 늘어나더라도 전반적인 산업투자를 이루도록 요구하였다. 정부 내에서도 성장론과 안정론이 팽팽하게 양립하고 있었다. 양쪽 의견 모두 일정한 정도의 산업 육성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경제정책은 경제안정론이었지만 한국정부는 새로운 경제계획을 세울 때마다 성장론에 근거한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보아 성장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분명하였다. 한국정부는 경공업 성장을 위한 자금은 원조자금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1951년 8월 기획처가 UNKRA(UN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유엔한국부흥국)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5개년계획안과 1953년 8월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경제재건계획의 기본방침], 1954년 7월 이승만 방미 때 미국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한국경제부흥 5개년계획안]은 모두 원조자금을 재원으로 경제성장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정부의 경공업 성장 계획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52년 5월의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 1953년 12월 '경제재건 및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 협약', 1955∼1957년 합동경제위원회가 만들어낸 규정 등에서 경제안정론이 그대로 관철되었다. 미국이 이승만정권의 경제성장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미국의 대극동정책으로 자리잡은 일본 공업화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기 구호목적의 경제원조는 1952년 5월 합동경제위원회(CEB; Combined Economic Board)가 설치되기 전 한국에 있던 현지 기구(중앙구호위원회; CEBRAG)가 계획하였다. 그러나 계획은 국내산업이나 재정금융을 고려한 우선 순위도 없었고, 구매권도 미국에 있어, 실질적으로 한국정부는 구호물자도입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즉 한국전쟁기 원조는 한국정부의 물동계획과 무관하였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물동계획에 필요한 원료와 시설을 무역으로 조달하려 했다. 무역에 필요한 자금은 민간 수출무역과 정부보유달러 확보를 통해 충당하려 했다. 수출의 진흥, 중석 수출, 유엔군대여금 상환 등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중석수출을 위해 1952년 미국과 중석협정을 체결했고, 유엔군대여금 상환을 위해 한미간 치열한 환율논쟁을 치러야 했다. 이처럼 정부보유불 확보는 미국과 직접 협상으로 추진되었다. 한편 이승만정권의 경제정책은 자립경제정책이었다. 경제성장론에서 안정론으로 변경되었지만 자립경제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자금조달이 원조에서 민간무역으로 변경되었을 뿐이다. 원료와 시설을 수입하기 위해 수출자원을 조성하려 했다. 무역통제를 통해 국내 산업을 재건하려 했던 대표적인 제도가 '수출입품링크제'였다. 이 제도는 수출품에 따라 수입품을 지정해 두는 제도였다. 주로 수출품과 성격이 비슷한 상품을 수입토록 하였다. 1951년부터 시작된 이 제도는 綿實 수출로 농약, 농기구, 공업용약품 및 원재료 등 농산물을 주로 수입케 했고, 중석은 수출해 완제품(선박, 각종 기계 부속품), 원료 및 반제품(원모, 소모사, 인견사, 생고무, 면사), 공업원료, 잡기계 등 기계류가 대상 수입품이었다. 그 외 동광석, 연광석, 일반 유화철, 무연탄, 고철 등에도 이 제도가 적용되었다. 이들 수출품의 대상 수입품은 대부분 기계류였고, 국내 시장에서 그다지 수요가 없는 품목이었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원조자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간산업의 육성을 위해 계획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정부의 무역정책이 수입대체산업화의 지향을 위한 정책이었지 무역업자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무역업자들은 대상 수입품을 수입하지 않고 수익성 있는 상품을 수입해 말썽을 빚곤 하였다. 여기서 일부분이긴 하지만 한국정부의 공업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수출보상이 약하고 다만 수입을 통한 경제재건 의지만 보여줘 무역업자로부터 외면받았다. 이 시기 주요 수입 자금은 대체로 무역업자가 수출해서 획득한 수출불과 정부가 수출해서 보유한 정부보유불이 중심이었다. 그 밖에 종교불, 구호불 등을 시중에서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수입이 허용되기도 하고, 금지되기도 했다. 민간수입업자는 당연히 수출불로 수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출만이 수입을 위한 전제였다. 정부는 수출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다양한 수출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이 1951년부터 시행된 특혜불에 의한 輸出賞與制度였다. 이 제도는 수출업자가 획득한 수출불 중 그 수출상품에 부여된 보상비율 만큼의 달러('특혜불'이라 함)에 한해 채산성 좋은 물품을 수입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해 수출을 자극하는 보상제도였다.
<표 1> 특혜불에 의한 수출상여제도의 변화 (단위 : %)
이 제도는 <표 1>에서처럼 보상비율이 평균 5%에서 40%까지 계속 증가하였고, 특정 품목에 대해서도 더 높은 보상비율을 부여했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수출품목 수와 대상 수입품목 수도 증가했다. 특히 특혜불로 수입할 수 있는 수입품목에는 정상수입품목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수입금지품목이나 사치품목이 포함되기도 했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가 되어 1952년 11월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출상여제도는 가장 확실한 수출 우대정책이었다. 다음으로 구상무역제도를 들 수 있다. 이 제도는 일본 이외의 지역으로 수출을 유도하기 위해 수익성이 높은 상품을 수입케 해 수출 피해를 보상해 주는 제도로 1952년 5월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1953년 1월 특별외화대부로 인한 무역자금의 방출로 수출위축이 예상되자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구상무역을 더욱 확대하였다. 이 제도는 1954년까지 수출품목이 증가했고, 수입허용품목도 설탕, 신문용지, 모사 등 국내시장에서 인기많은 품목이었다.
<표 2> 구상무역품 및 수입허가품
자료 : 한국무역협회, {무역년감}, 1954, Ⅱ-6∼7쪽에서 정리.
한편 섬유류, 각종 유지, 수지, 기타 용지, 파라핀왁스, 화학약품, 의약품, 외국영화, 사진용기재 등은 수출불로만 수입이 가능한 수출불 우대제도가 실시되었다. 수출불로 수입 가능한 품목에 1953년 3·4분기에는 설탕, 모사, 신문용지 등이, 1954년 1·4분기부터 호마가 각각 추가되었다. 이처럼 수출불은 종교불, 시중불, 경매불, 대부불 등 다양한 수입용 외환으로는 수입할 수 없는 상품을 수입하여 이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출불로 수익성 높은 상품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출불의 시중환율이 가장 높았고, 이런 정책은 수출을 자극하였다. 수출실적은 수입품목에서 뿐만 아니라 수입용 정부불을 대부받는데도 유리했다. 대표적인 것이 특별외화대부제였다. 특별외화대부는 부족한 식량난 해결, 산업기자재 도입을 통한 생산부흥 추진, 통화량 흡수에 의한 인플레 억제를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부대상은 실수요자와 무역업자로 나뉘었는데, 무역업자에게 대부된 달러는 수출실적이 배정의 중요 근거였다. 1954년에는 수출장려책으로 수출장려보상금제도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1952년 수출상품 생산자보다 수출업자에게 적자수출에 따른 보상비를 지급할 계획으로 마련하였으나 실시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인 1954년 12월 수출장려금 3천 9백만원을 마련하여 1955년 1월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보조금 지급 방법은 1차로 1954년 4월∼7월까지 수출품 중 고령토, 蠟石, 형석, 건멸치, 건어 등 5종목이 국내시세보다 외국시세가 낮아 적자수출했다고 판단해 보상금 7백 70여만원을 지불했다. 2차는 1월말에 계획을 세웠으나 정부의 예산부족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상에서 ECA 원조자금 제공시기 미국의 대한 경제정책과 한국정부의 수출정책을 정리하였다. 미국은 일본 상품 구매를 목적으로 한국 공업화보다 인플레 억제를 위한 긴축재정정책을 우선시하였다. 반면 한국정부는 경제성장론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가졌지만, 원조를 제공하는 미국의 요구로 안정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한국전쟁기 높아진 인플레를 억제하기 위해 긴축재정정책을 선택하는 한편 경공업 성장도 적극 추진하였다. 정부는 경공업 육성에 필요한 시설과 원료 수입에 필요한 달러는 정부보유불과 수출불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정부보유불 확보는 한미간 치열한 환율논쟁을 야기했고, 수출불은 철저한 수출진흥책을 통해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조 위에서 수출을 장려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즉 수출불상여제도, 구상무역제도, 수출장려보상금제도, 수출불우대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Ⅱ. FOA 경제원조와 수출진흥책의 축소 한국전쟁 휴전을 계기로 미국의 대한 부흥원조가 계획되었다. 이 원조의 내용을 둘러싼 논쟁은 한미간 경제정책의 방향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일어났다. 즉 한국은 경제부흥을, 미국은 일본 공업화를 위한 한국의 경제안정을 각각 추구하였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 공산품과 한국 시장을 연결하는 지역경제통합을 구상하였다. 이는 미국의 원조 효율화, 즉 한국에 투입된 원조자금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본 공업을 육성시키는 '달러의 이중 움직임'을 실현시키려는 의도였다. 한국전쟁 特需로 성장의 기반을 다진 일본이 한국전쟁 휴전과 동시에 심각한 불황을 겪자 특수의 존속이 필요하였다. 미국은 당시 일본 내에서 중국과의 경제관계 회복 움직임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던 상황에서, 이를 제어하기 위해 원조자금으로 대일 구매를 실현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이 원조자금으로 대일 구매를 하도록 요구했다. 대일 구매를 위해서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철저히 통제되어야 했다. 경제성장을 위한 재정투자는 인플레 억제를 이유로 통제되었고, 오히려 군사부문 투자를 장려했다. 군사비 투자로 인한 재정적자는 원조자금 판매대금인 대충자금으로 조달토록 하고, 대충자금의 대량 확보를 위해 환율 인상을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의 원조정책은 일본의 공업화 달성과 한국의 경제를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반면 한국정부는 이 원조자금으로 1949년부터 추진해 온 경제성장 구상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1953년 8월 타스카(Henry J. Tasca)조사단의 파견에 맞춰 제출한 [경제재건계획의 기본방침], 1954년 7월 이승만의 방미를 계기로 작성된 [한국경제부흥 5개년 계획] 등을 통해 자립경제와 경제성장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자본재와 소비재의 도입비율을 7대 3으로 요구하였다. 산업부흥에 필요한 자본재를 낮은 가격으로 도입하기 위해 저환율 정책을 유지해야 했다. 또 성장에 필요한 원료와 자재 도입을 위해 구매권을 요구하고 구매지역을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조달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한미간 논쟁은 원조의 내용(소비재와 생산재)과 환율, 구매지역, 구매권으로 집중되었다. 이 중 원조의 내용은 미국측 요구가 그대로 관철되었다. 한국정부는 구매품 가운데 경제부흥을 위한 시설사업부문에 60%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안정론을 내세워 반대했고, 생산재와 소비재 약 3대 7의 비율로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1956년 1월 합동경제위원회 결의로 시설사업부문 30%, 판매용 민수물자부문 68%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시설사업부문도 물가안정 및 재정적자 해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중시하여 국내 수요가 큰 생필품 소비재를 생산하면서 그 원료가 원조로 도입하기가 용이하며, 또 그 생산시설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 제조업부문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였다. 공정환율은 미국의 요구대로 대체로 평가절하되었고, 1953년 12월 180환:1, 1955년 8월 500환:1로 결정되었다. 원조의 내용과 환율은 미국의 의도가 거의 관철되었던데 비해 구매지역과 구매권은 한국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한국정부의 강력한 구매권 요구에 대해 미국은 일정한 '안전장치' 내에서 허용하였다. '안전장치'란 무역업자의 활용이었다. 미국은 실수요자 구매를 최대한 줄이고 무역업자 구매를 최대한 늘릴 것을 주장했다. 무역업자는 경제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수입이윤이 충족되면 일본에서 물자조달에 적극적일 것이라는 점, 수입 자금을 확보하려는 경쟁심을 자극해 환율을 인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 원조제공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1950년대 전반기 수입 원천별 환율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수출불, 종교불, 경매불 등의 환율 가운데 수출불의 가치가 가장 높았다. | ||||||||||||||||||||||||||||||||||||||||||||||||||||||||||||||||||||||||||||||||||||||||||||||||||||
수출불은 수입품목에서 다른 외환에 비해 많은 특혜를 받았다. 무역업자는 수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조자금의 민간불하가 진행되어도 수출불이 계속 우대될 경우 미국이 제공하는 경매불이나 원조불은 수출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치가 적어 무역업자로부터 상대적인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수요가 적으면 환율이 떨어질 것이었기 때문에 환율인상을 위해 수출불 우대를 폐지하고 원조불·경매불에도 수출불과 동일한 가치를 부여해야 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유엔군 경매불 방출을 계기로 1954년 12월 유엔군 경매불과 수출불을 동일 취급해 줄 것을 한국정부에 요구하였다. 한국정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수출불, 종교불, 경매불 등을 모두 일반불로 통합하였다.
종래에 수입이 가능하던 외환 중 수출불을 위시하여 종교불, 産金弗, 선박불을 일반불로 병합 통일하여 나머지 특혜불과의 2종으로 한 것 등인데 이는 금후 무역정책에 일대 변혁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 즉 종래 수출불과 종교불 및 산금불 그리고 최근에 수출불의 대우를 받게 된 선박불은 모두 이로써 수입이 가능한 외환이기는 하나 그 불의 종류에 따라 물자수입에 제한이 있었던 것인데 이를 전부 일반불이란 各稱아래 일원화하여 동일한 대우를 하게 되었다는 바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도 관계 당국과의 합의도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정책은 1955년 1월부터 실시되는 무역계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달러 종류를 일반불과 특혜불로만 구분하여 수입에서 전자로는 정상수입품만을, 후자로는 특수수입품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해 형식적으로는 수출불의 특혜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 때의 수출불 특혜는 과거의 특혜였던 구상무역, 수출불우대제가 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많이 줄었다. 게다가 1956년 수출불이 일반불로 취급되면서 수출불을 통해 확보된 특혜불도 제기능을 못하여 수출촉진을 위한 수출불 우대정책은 사라졌다. 이리하여 원조자금 제공을 계기로 수입용 외환의 차별이 거의 제거되었다.
한편 한국정부 또한 수출불의 가치를 일반불과 동일시할 것을 요구한 미국의 제안을 수용한 이유는 수입대체산업화의 자금을 기존의 수출불에서 원조자금으로 대체하려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정부는 더 많은 달러 확보를 위해 원조자금과 유엔군 사용 환화 경매에서 낮은 환율을 유지하려 했다. 저환율정책은 한편으로 원조 원료의 가격을 낮추어 산업자본가들의 생산이익을 높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달러 확보의 중심을 원조에 둔 한국정부에게 원조를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은 원조자금의 규모, 구매권, 품목 등에서 보다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정부의 정책이 원조중심으로 변화함에 따라 무역통제의 해제와 각종 달러의 민간무역업자로의 배정은 활발해졌다. 우선 일반 무역업자들은 수입용 외환을 유엔군불, 정부불 뿐만 아니라 원조자금으로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대외경쟁력이 약한 수출을 통한 달러 확보보다 상대적으로 손쉬운 선착순이나 추첨으로 달러를 확보하는 길을 택하였다.
일반불의 대부분은 정부와 유엔군 달러의 경매불이었다. 유엔군경매불(1954년 11월 29일∼1955년 8월 8일까지 23회, 3천 947만 6천 달러), 간접군원불(군납불; 1956년 5월, 333만 2천 917달러), 정부매각외환(1955년 8월 29일∼1956년 1월 29일 소비재 2천 59만 3천 67달러 및 2백만 파운드, 시설재 181만 6천 85달러) 등이었다. 정부불은 ICA 원조자금이 본격화되는 1956년 1월 원조자금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즉 원조자금의 순조로운 매각을 위해 중지되었다. 이 외환들은 선착순제나 추첨제로 배정되었을 뿐 수출실적과 연계해 배정되지 않았다.
원조자금은 민수물자 구매자금과 실수요자 구매자금으로 구분되었는데, 무역업자가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민수물자 구매자금이었다. 1955년 10월 현재 규정에 의하면 이 자금의 배정원칙은 선착순이고, 단 신청기간 첫날에 신청총액이 구매승인서 금액을 초과할 때는 당일 신청접수를 마감하고 추첨으로 배정하였다.
1957년 2월 물가 상승에 따른 공정환율과 실세환율과의 격차가 커지자 원조자금 공매에 투기 경향이 일어났다. 정부는 이를 억제하고(500대 1 환율 유지가 목표), 현행 공정환율을 유지하면서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國債添加率制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는 500대 1 달러 배정에서 경합이 있을 경우 달러 당 30환 이상 국채를 구입케하는 방법으로 국채를 많이 구입하는 순서에 따라 달러를 배정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500대 1의 환율을 유지하면서도 경쟁입찰을 혼용한 것이었다. 이 제도는 1958년 8월 달러 당 150환의 정액세와 별도의 공매세를 징수토록 하면서 외환세부과제로 전환하였다. 나아가 정부는 같은 해 10월 1달러 당 300환 이상을 적립한 입찰자 가운데 임시외환특별세법에 의한 세액(1달러 당 150환 이상, 10환 단위)을 고율로 입찰한 자에게 순차적으로 낙찰을 결정하였다. 즉 원조자금 배정방식은 500대 1의 단일환율을 유지하면서 국채소화나 외환세를 부과하는 경쟁입찰 형식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부과세를 조달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응찰할 수 있었다. 무역업자들은 부족한 자금을 거래은행으로부터 '當日貸越'이라는 하루 대출을 많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건에서 원조달러의 공매는 수출진흥과 아무런 관련없이 진행되었다. 미국은 무역진흥을 위해 수출실적과 원조달러 공매를 연계시키자는 일부 의견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원조달러가 아무런 제한없이 소비되어 미국이 목표로 하는 한국의 경제안정에 기여하고, 무역업자가 대일 구매를 확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원조물자 제공이 본격화되는 1956년 들어 정부는 ICA 민수자금을 최우선적으로 소화시키기 위해 비인기품목에 배정했던 자금을 인기품목으로 변경, 종래 원조자금 공매시 총 환화의 80%를 일시에 납부하던 것을 20%와 60%로 분할 납부해 무역업자의 부담을 줄이고, ICA 민수물자는 일반 수입대상품목에서 제외 내지는 제한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무역업자 구매를 적극 지원하여 가능한 한 필요한 물자를 원조자금으로 조달하려 했다.
이상에서 정부불, 유엔군불, 원조불 등 수출불 이외의 달러를 사용한 수입 활성화를 위해 기존의 수출불 우대정책이 폐기되는 것을 확인했다. FOA 원조가 본격화되는 1954·55년 수출불에 적용되던 각종 특혜는 사라졌다.
구상무역제도는 1954년부터 구상무역 적용 수출품은 확대되었으나 대상수입품 중 수익률이 높은 상품은 극소수로 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정된 상품수입에만 집중되어 해당 품목의 국내 시세가 떨어져 구상무역은 점차 쇠퇴하였다. 1954년 5월부터 A급 수출품의 대상으로만 수입되던 물품을 일반 수출불로도 동등하게 수입할 수 있게 되면서 구상무역의 특혜는 완전히 사라졌다. 1955년에도 제도적으로는 존재하였지만 더 이상 구상무역이 수출진흥책으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수출손실금 보상제도 또한 1955년 1월 1차 실행 이후 예산부족으로 중지되었다.
그리고 1955년 이후 특혜불로 특수수입품목을 구입할 수 있어 일정한 수출불 특혜가 유지되었지만 1956년 정부 경매불이 없어져 정상수입을 위한 일반불이 없어지자 특혜불로 정상수입품까지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특혜불의 상대적 우대조치는 사라졌다. 이 결과 원조자금으로 도입된 물자는 수익이 좋았던데 비해 수출불로써 수입하는 민간무역은 그렇지 못했다.
<표 4>는 1955년 10월 현재의 수출입원가를 비교한 것이다. 수출원가가 외국시장 판매원가와 비교해 달러당 700환대에서 높게는 1000환대까지로 평균 876환이었다. 그런데 이 상품을 수출해서 확보한 수출불로 수입할 경우 수입품은 도매가격이 달러당 600환대에서 900환대로 평균 820환으로 도매시장에 팔렸다. 즉 수출 비용은 876환이고, 수입품의 도매가격은 820환이었기 때문에 56환의 적자수출이었다. 이에 비해 원조물자의 수입품 도매가격은 평균 987환으로 민간 수입품보다 이익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수입용 외환을 500환:1달러로 배정받았기 때문에 약 2배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표 4> 1950년대 중반 수출입물자 수지표(1955년 10월 15일 현재)
|
수 출 |
수 입 |
||||||||
|
품목 |
단위 |
수출원가 (환) |
수출가격 FOB(달러) |
비율 |
품목 |
단위 |
수입원가 CIF($) |
도매가격(환) |
비율 |
|
생사 |
M/T |
7,993,000 |
8,220.00 |
911:1 |
셀로판지 |
連 |
15.65 |
14,268 |
911:1 |
|
형석 |
M/T |
24,500 |
36.00 |
765:1 |
모조지 |
連 |
15.00 |
9,389 |
626:1 |
|
고령토 |
M/T |
16,500 |
22.00 |
916:1 |
타자지 |
連 |
3.45 |
3,058 |
886:1 |
|
蠟石 |
M/T |
10,500 |
14.50 |
1000:1 |
회중전등 |
打 |
3.20 |
2,404 |
751:1 |
|
연광석 |
M/T |
114,500 |
145.00 |
812:1 |
수직모사 |
LB |
2.35 |
2,054 |
874:1 |
|
滿庵鑛石 |
M/T |
29,500 |
42.00 |
776:1 |
뽀뿌링 |
疋 |
16.50 |
13,674 |
829:1 |
|
활석 |
M/T |
19,500 |
25.00 |
929:1 |
커피 |
缶 |
23.90 |
19,278 |
816:1 |
|
한천 |
M/T |
2,147,000 |
2,200.00 |
985:1 |
硫酸紙 |
連 |
7.50 |
6,527 |
870:1 |
|
건오징어 |
M/T |
249,000 |
300.00 |
998:1 |
|
|
|
|
|
|
건멸치 |
M/T |
302,700 |
400.00 |
772:1 |
|
|
|
|
|
|
평균 |
|
|
|
876:1 |
평균 |
|
|
|
820:1 |
|
자료 : 상공부, [輸出五個年計劃과 輸出振興要領에 關한 統計資料](Ⅱ), 1956년. 참고 : 1. 가격산정에서 생사는 미국, 한천과 건오징어는 홍콩, 나머지는 일본을 기준으로 했음. 2. 수입품의 도매가격은 수입세와 수입에 필요한 제 비용을 제외한 가격임. |
|||||||||
원조자금의 무역업자 배정은 무역업자의 수출의욕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부 또한 공업화 자금을 원조자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역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 적극적인 수출정책이 필요없었다. 오히려 FOA 원조자금의 순조로운 배정을 위해 1950년대 전반기 실시되었던 수출진흥정책은 폐기되어야 했다.
Ⅲ. 경제원조의 축소와 무역법 제정
1950년대 중반 세계질서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동서 양 진영간의 냉전이 한국전쟁 때 무력대결로 표면화되었던 것과 달리 평화공세로 전환하였다.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권은 인근 사회주의 국가에 대규모 경제원조로 경제부흥을 달성시켰다. 북한 또한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면서 남한을 향해 각종 평화공세를 시작하였다.
사회주의권의 정세변화에 미국 또한 새로운 변화를 강요받았다. 한국 또한 기존의 안정론보다 경제부흥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경제계획을 위한 새로운 원조의 증액은 미국 재정보수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하였고, 아이젠하워는 '돈먹는 벌레'인 한국이라는 '지출의 늪에서 빠져나올 뭔가의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 방안이 막대하게 투입되던 군비를 줄이고 이를 경제원조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군비삭감에 따른 미국 군부와 한국정부의 저항에 대응하고, 일본의 반핵운동에 직면했던 일본 본토의 핵 배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한국으로 연합군사령부의 이동과 핵배치를 추진하려 하였다. 이런 미국 정책의 변화를 위한 커다란 밑그림 아래에서 다양한 정치적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1956년 7월 주한미국대사로 다우링(Walter C. Dowling)이, 경제조정관으로 원(William E. Warne)이 각각 임명되었다. 원 경제조정관은 한국 경제성장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경제성장론에 바탕한 한국의 경제계획 추진을 위해 군사비 삭감과 한국정부의 정책쇄신을 요구하였다.
이승만정권도 북한의 경제성장과 대남 평화공세,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절반의 패배로 인해 새로운 경제정책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1956년 이후 미국의 경제원조가 점차 감소되는 경향은 한국 경제 전문가들로 하여금 스스로 경제계획을 준비하게 만들었다. 경제계획은 긴축재정을 목표로 하는 기존의 경제안정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경제성장론이었다.
자립경제 달성을 위한 한 방법으로 무역 진흥이 제기되었다. 1956년 상공부가 대외 극비로 작성한 [貿易體制强化要領](1956. 4. 28)은 원조자금의 감소에 따른 무역체제 정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서를 제안하는 이유를 "我國의 산업경제부흥에는 당분간 막대한 외국원조가 필요하나 외국원조의 중단 내지 종식에 대비하고 국제수지균형을 확보하기 위하여서는 지금부터 수출입균형을 목표로 하는 무역체제가 확립 강화되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원조자금에 의존하는 수입구조를 수출 중심 구조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위해 수출보상 및 진흥책, 수입계획 및 외화 활용책, 무역행정의 일원화 등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할 것을 요구하고, 특히 수출진흥책을 위한 다양한 통계 분석까지 첨부하였다.
<표 5> 상공부 수출진흥 대책
|
민수물자 구입용 원조자금 배정에서 경합이 있을 경우 수출업자에게 우선 배정한다. |
|
원조자금 구매 상대국에 구매액의 2할을 한국 수출품으로 구매하도록 의무화시킨다(단 미국은 제외) |
|
무역협정 체결을 촉진한다. |
|
수출물자 제조용 수입품은 관세를 면제한다. |
|
|
|
|
|
수출외화의 수입계정간 이체를 허용한다. |
|
수출입 무역금융 융자를 늘린다. |
|
특정상품의 신시장 개척자에 1년간 해당지역에 수출을 독점케 한다. |
|
국내산업 보호육성에 대하여 관세율과 관세법 운영의 적정을 기하기로 하고 수입금지제를 완화한다. |
|
수출품 생산업체에 설비와 기술도입에 원조자금을 우선 배정한다. |
|
재외공관에 상무담당관을 늘리고, 월 2회 경제상황을 보고케 한다. |
|
자료 : 상공부, [輸出五個年計劃과 輸出振興要領(案)], 1956년. |
상공부는 1956년 9월 [무역체제강화요령]의 내용을 좀 더 보충하여 수출무역 5개년계획을 세워 타 관계부처와 협의를 시작했다. 그 주요 내용은 <표 5>와 같다.
이 내용에서는 원조자금과 수출을 연계시킨다는 점, 수출물자 제조용 수입품의 무관세, 신시장 개척자에게 독점 수출권 부여, 무역협정 체결과 상무담당관 증원 등이 주요 골자였다.
이러한 수출진흥을 토대로 수출은 1957년부터 1961년까지 기존의 광산물, 수산물 중심에서 광산물의 비중을 줄이고 농산물과 공산물 비중을 대폭 늘리도록 계획되었다. 이 중 1961년을 기준으로 미곡 16.61%, 면포 11.73%, 중석 9.77%로 수출 비중을 책정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조자금과 수출의 연계였는데, 상공부는 1957년 2월 이 문제를 합동경제위원회에 상정하였으나, 미국정부의 반대로 폐기되었다. 상공부는 1956년 이후 계속해서 수출 확대를 위한 다양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원조에 대체할 수 있는 무역의 자생력 강화를 위한 상공부의 노력은 무역법 입안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동안 무역관련 법규는 군정법령 149호(1947년 8월 25일)와 정부수립 후 대통령령 제324호(1950년 4월 10일)를 기본으로 각종 고시나 공고를 통해 그때 그때 현실적인 방안을 강구하였다. 1955년 할당제와 수입허가제가 폐지되면서 정부통제는 느슨해지고, 수출입 담당 부서는 재무부, 상공부, 한국은행 등 다양하여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므로 상공부는 무역 행정의 일원화와 수출진흥을 목적으로 무역법을 입안하였다.
상공부는 무역을 헌법이 규정하는 국가 통제 아래 둔다는 커다란 원칙에 입각하여 1956년 4월 무역법안 전문 16조와 부칙을 작성해서 5월 8일 법제실에 회부하였고, 같은 해 7월 10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8월 10일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1957년 5월 4일 폐기되었고, 다시 상공 및 재정경제위원회가 대안을 작성하여 11월 12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여 통과된 후 12월 13일 법률 제460호로 공포되었다. 1958년 3월 18일 [무역법시행령](대통령령 제1351호) 및 [무역위원회규정](대통령령 제1352호)이 각 각 공포되었고, 5월 7일 상공부령 제45호로 [무역법시행세칙]이 공포되었다.
이 규정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무역관련 여러 규칙의 종합 정리였다. 그리고 당면한 수출진흥을 위한 방안을 아울러 제시하였다. 무역법은 "수출을 진흥하여 수입을 조정하고 건전한 거래를 촉진함으로써 국제수지의 균형과 국민경제의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2조에서 무역계획은 수출입허가품목, 또는 수출입금지품목, 수출입품의 종목별 수량, 금액의 한도, 규격, 지역, 기타 제한사항을 무역 연도별 또는 2분기별로 종합 책정한 것을 말한다고 규정하여 기존 할당제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5조 수출입허가에서는 상공부장관이 수출입 허가를 관장하면서 정상적인 품목은 한국은행장에게 수출입 업무를 위임하여 상공부장관-한국은행장 관계를 설정하여 그동안 혼돈상태에 있던 지휘체계를 정리하였다.
이 두 조항을 통해 1950년대 전반기 할당제와 수입허가제가 대체로 부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허가 절차는 다소 간편해졌을지라도 형식은 국가 통제가 다시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출장려를 위한 규정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1조에서는 정부가 수출을 장려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물품에 대하여 대통령령에 따라 수출장려금을 교부하거나 기타 유효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전제 아래 시행세칙 40조 외화배정에서 다음과 같은 수출진흥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정부보유불이나 원조자금을 물자 도입에 배정할 때 그 전부 또는 일부를 수출실적업자에게 배정할 수 있도록 했고, 수출로 획득한 수출불 또한 그 전부 또는 일부를 특정한 물품의 수입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내용은 원조자금과 수출실적을 연계해 수출을 진흥시키려고 했던 일련의 노력을 법으로 정하여 운영하려 한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특혜불제도의 재실시를 구상하였다.
이처럼 무역법은 [貿易體制强化要領]과 [輸出五個年計劃] 등 상공부의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을 수용하면서 1950년대 전반기 정부의 무역통제정책을 복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마련되었고, 그러한 내용이 법안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무역법을 실행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1958년 5월 31일 무역법이 공포된 이후 첫 무역계획이 발표되었는데, 제2조에 따라 무역품의 종목별, 수량, 금액의 한도, 규격 등이 명시되어야 했으나, 각종 품목을 수출허용, 수출금지, 수입허용, 수입금지로만 나누고 품목을 나열했을 뿐, 수량과 금액을 전혀 표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무역법 실행을 위한 사전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할당제에 필요한 수요량, 가격, 규격 등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제도만 너무 앞서갔다. 준비 부족은 수출입품의 가격결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기준 가격을 산정할 수 있는 기본 자료도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수출진흥을 목적으로 했던 무역법은 오히려 채산성있는 품목의 수출입절차를 강화하여 역효과를 내었다.
법 시행을 위해 필요한 사전 협상이 준비되지 못한 점도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 원조자금과 수출실적의 연계는 미국정부가 원칙적으로 반대하였고, 부흥부도 이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실효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부보유불 방출도 재무부의 양해로써 실시될 수 있었지만, 정부보유불이 그다지 넉넉지 않아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수출진흥을 위한 장애도 많았지만, 무역법 제정을 계기로 수출진흥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었다. 특히 1959년 2월 드레이퍼(William H. Draper)의 방한을 계기로 합동경제위원회에 한미 각각 3명씩으로 수출진흥분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수출진흥을 위한 융자기금으로 대충자금 20억환을 수출진흥기금으로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상공부, 대한상공회의소, 무역협회, 재무부가 각각 수출진흥을 위한 여러 방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결국 1954년 이후 거의 폐기되었던 수출진흥책은 1956년 하반기부터 미국의 원조정책 변화, 한국의 국내정치 불안 등을 해결할 대안으로 경제성장론이 제기되면서 새롭게 부각되었다. 1956년부터 계획되었던 수출진흥계획은 1957년 무역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여전히 원조자금 배정이 수출무역과 연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출진흥책은 그다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만 1950년대말 경제성장론의 필요성과 적극적인 수출진흥책이 계획되었다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
이상에서 1956년 이후 국내외 정세변화와 원조삭감을 계기로 경제성장론이 강력히 요구되었고, 그 자금 또한 수출을 통해 확보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이를 계기로 1956년부터 수출진흥책이 강구되다가 1957년 무역법이 제정·공포되어, 수출진흥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었다. 이 법은 여러 가지 한계는 있었지만 수출진흥의 중요성 속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맺음말
이상에서 이승만정권기 원조정책의 변화에 따른 수출정책의 변화를 검토하였다. 정부수립 후 경제정책은 자립경제 건설을 위해 공업화를 추진하는 경제성장론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ECA 원조자금으로 한국 공업화보다 일본 공업화를 목표로 한국에 대일 구매를 요구하였다. 이에 이승만정권은 한국 공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원조보다 대외 수출로 충당하기 위해 다양한 수출진흥책을 구사하였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생필품 부족이 심각했던 현실에서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 주요 수출진흥책은 특혜외환 상여제도, 수출불로만 수입가능한 수입품 지정, 구상무역, 수출장려보상금제 등이었다. 이들 제도는 수출해서 확보한 수출불에 다양한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수출을 자극하는 정책이었다.
한국전쟁 휴전과 동시에 미국은 부흥원조를 계획하면서 한국에 계속해서 경제안정론을 요구하였다. 경제안정을 위해 인플레를 억제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인플레 억제를 위해 한국의 환율을 인상하여 통화량을 흡수하는 한편 일본에서 생활필수품을 수입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환율인상은 미국 재정부담을 완화하겠다는 의도와 대충자금을 늘려 한국의 군사비에 충당하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대일구매는 일본의 공업화를 목표로 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주장한 경제안정론은 미국의 재정문제와 일본 공업화를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환율인상과 대일구매를 위해 무역업자 자유공매를 요구하였다. 수입용 외환을 대부분 어려운 수출에 의존했던 무역업자로서는 대환영이었다. 미국은 무역업자가 적극적으로 원조 공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동안 한국정부가 실시해왔던 수출진흥책과 수출불 우대정책 폐지를 요구하였다. 한국정부 또한 일정한 한계는 있었을지라도 원조자금으로 공업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처럼 원조자금의 배정은 무역을 통한 공업화나 자본축적의 계기를 변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원조자금 배정은 전혀 수출실적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수출이 부진해야만 미국의 원조제공 목표를 더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을 포함한 사회주의권의 경제성장은 미국의 대외 점령정책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다. 한국 또한 경제성장을 필요로 하였다. 한국을 위한 추가 경제원조자금 확보가 어려웠던 미국 행정부는 기존 군사원조를 경제원조로 전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미국 내 육군성과 한국정부의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한국정부에서도 1956년 선거의 절반 패배, 북한의 평화공세, 경제원조 삭감 등의 영향을 받아 경제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한 시도로 수출촉진책을 다시 강구하여 1957년 11월 무역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무역법은 기존에 결정·시행되고 있던 수출실적과 원조자금 배정을 연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 원조당국의 비협조, 무역법 시행을 위한 준비 소홀로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수출진흥책은 유지되었다.
이승만정권의 경제정책이 경제성장론→경제안정론→경제성장론 지향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역정책 또한 수출진흥→수출 방기→수출진흥의 지향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 속에서 이승만정권이 경제성장을 목표로하는 공업화라는 골격 아래 원조와 무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승만정권의 수출정책은 공업화라는 경제성장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배경으로 필요하였다.
【Abstract】
The Change of Aid Policy toward Korea of America in 1950's and Export Policy in Lee Seung-Man Regime
Cha, Chul Wook
The fundamental economic policy in Lee Seung-Man regime was the economic growth theory promoting an industrialization for constructing an economic independence. Since 1949, USA had demanded to import goods from Japan by paying the aid funds. Lee regime sought the various export promotion policies to appropriate the funds-not an aids but a foreign export, for industrialization.
After Korean War, USA with FOA aids as a momentum called upon Korea to an economic stabilization theory. USA tried to realize this by raising exchange rate and purchasing Japan produced goods. Therefore, USA sold the aid funds to traders by public auction. USA made the korean traders choose the aid-dollar instead of the export-dollar which had received preferential treatment in import. In this way, Korean government did away with privilege, and the export promotion policy was disused.
After the middle of 1950's, as socialist states' economic growth and peace offensive, USA couldn't raise the aids and required Korea to carry out the economic growth policy. The export promotion policy was one measure of this policy. Korean government announced the trade bill, November 1957. Although Korean government's the export promotion policy had several limites, it is obvious that this policy was one of the positive economic growth policy in Lee regime.